문효진

심천개방원 충효개문주’(深天開放苑 忠孝開門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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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의 삶을 위해 자신을 불태웠던 예술가

문효진 (文孝進, Hyo Jin Steve Moon. 1962~2008)

 

문효진은 대한민국 출생의 음악가 겸 미디어사업가이자 세계적인 청년 평화운동가이며 인류의 부모이신 하나님 앞에 효정(孝情)의 모델이 된 신앙인이다. 1988년 재생(再生) 앨범을 시작으로 짧은 만 45년의 생애 동안 직접 작사, 작곡, 편곡한 15개의 정규 앨범과 2개의 비정규 앨범을 남겼다. 인류의 부모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해 온 양친 문선명·한학자 총재를 향한 효정(孝情)을 정열적으로 노래하였으며, 참된 가정의 중요성과 사회의 부조리를 직설적인 가사와 화법으로 표현하여 대중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2000~2002년에는 10,000여 곡을 목표로 불철주야 작사, 작곡, 연주, 녹음하여 가수로서 혼을 불사르는 놀라운 생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6년 맨해튼센터 스튜디오를 설립한 이래로 미디어사업가로서 한국영화 「올드보이」(2003)에 음악을 제공하였고, 「울학교 이티」(2008) 제작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그룹가수 「거북이」와 가수 「차진영」의 음반을 제작하였다. 또한 「예수의 초상화」(The Portrait of Jesus)를 비롯하여 20여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종교, 가정,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였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는 세계원리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아 냉전종식과 세계평화 실현을 위한 청년운동을 선두에서 이끌며 헌신하였다.

 

가족 (家族, Family)

 

문효진은 1999년 2월 5일 최연아와 성혼하였으며 슬하에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로는 신출(信出), 신흥(信舆), 신녀(信女), 신순(信順), 신진(信振)이 있다.

文孝進は1999年2月5日崔妍娥と成婚し3男2女に恵まれた。子供達の名は信出, 信舆, 信女, 信順, 信振である。

 

탄생과 어린시절 (出生幼少期,  Birth and Childhood)

 

문효진은 1962년 12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71-3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전 본부교회에서 태어났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공동창시자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7남 7녀 중 장남으로 어릴 때부터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소질을 보여주며 성장하였다. 자다가도 새벽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할 정도로 ‘음(音)’에 대해 특별한 인지능력이 있었다. 바이올린,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웠으며, KBS 노래자랑에 출연하여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학력 (学歴, Education)

 

1969년 대한민국 경복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73년 4학년 재학 중 미국 뉴욕의 해클리스쿨(Hackley School)로 전학하였다. 고교시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79년 2월 선화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2003년 6월 미국 Unificati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 종교학 석사학위(Master of Religious Education)를 취득하였다. 세계평화를 위한 청년운동과 사회교육을 위한 미디어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2월 선문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Honorable Doctor of Theology)를 받았다.

세계평화를 위한 청년운동 (世界平和の為の青年運動, Youth Movements for World Peace)

문효진은 1982년 8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세계대학원리연구회 초대 세계회장으로 재임하였다. 세계대학원리연구회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이념을 공유하는 세계청년들의 평화운동단체다. 세계대학원리연구회는 인류의 부모이신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따라 인격완성, 참된 가정의 실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참된 사랑의 실천을 주창하며 세계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문효진은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유신론적 민주주의의 냉전체제 하에서 세계청년들을 규합하고 공산주의 종언운동을 펼쳤다. 특히 1987년에는 베를린 세계대학원리연구회 대회를 개최하여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서냉전시대와 공산주의를 종결지을 것을 세계청년 앞에 열정적으로 외쳤다.

음악 및 멀티미디어 사업 (音楽及びメディア事業, Entrepreneurship in Music and Multimedia)

 

문효진은 청년시절부터 21세기가 ‘문화와 예술의 세계’가 될 것을 예견하고 1986년 맨해튼센터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이후 1집 재생(再生, Rebirth) 1988, 2집 Offering Songs 1989, 3집 Star Songs 1990, 4집 한국통일(韓國統一 Unification Of Korea) 1990, 5집 사랑과 약속 1991, 6집 지옥은 불탄다 1991, 7집 천전낙원(天前樂園 Paradise Before Heaven) 1991, 8집 Beat The Devil Out Of You 1991, 9집 Bag’Em and Tag’Em 1991, 10집 Devil Grinder 1992, 11집 나의 맹세 1992, 12집 Devil’s Nutcracker 1992, 13집 AXE6 1993, 14집 The Keeper 1993, 15집 The Pit 1994 등 15개의 정규앨범과 2개의 비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문효진의 음악은 극도로 상업화되고 세속화된 세계의 문제를 묵직하고 강력한 음성으로 비판하며 참사랑의 심정문화혁명을 새롭게 외치는 또 다른 의미의 얼터너티브라고 할 수 있다. 부친인 문선명 총재가 서너 시간을 넘기며 열정적으로 말씀을 외쳐 선포하는 모습을 닮은 문효진의 음악은 보기 드문 심정폭발의 사례라고 하겠다.

문효진은 사회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있는 힘을 다해 미디어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1990년도부터 20여 편의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미국에서 제작하는데 참여하였으며 2003년에는 한국에서 ‘MCS Entertainment’를, 2006년에는 일본에서 ‘MCJ Holdings’를 설립하여 아시아에서 미디어 사업을 진행하였다. 가수로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재생, 역, 영애를 주제로 일본에서 공연하였으며, 한국에서도 2007년 3월 17일 영애를 주제로 공연하면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한국에서는 영화음악과 가수 음반제작에 참여하면서 미디어 사업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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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문화세계와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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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강하게 단련되는
그의 끝없는 열정

인류의 부모이신 하나님과 참부모이신 문선명·한학자 총재에게 바친 효정

 

문효진은 부친이신 문선명 총재의 댄버리 수감 기간 동안 면회하면서 특별한 15개의 시를 지었다. 문선명 총재는 1984년 7월말부터 9월 9일까지 15회의 면회기간을 통해 문효진에게 손수 시제를 주어 심정문화의 영성을 꽃피우게 하였다. 당시 작성한 시제는 다음과 같다.

  • 승리하는 사람
  • 나의 존경하는 천지의 꽃 – 너의 꿈과 아버지의 이상
  • 봄날을 홀로 춤추리
  • 나만이 높고 싶어하는구나 – 높고 넒은 세상조차 나를 환영하고 응하리라
  • 꽃과 향기는 한마음의 뿌리
  • 싸우면서 전진하리
  • 손꼽아 헤어 찾은 희망꽃
  • 곧게 살아보세
  • 앞뒤를 살피어 전진하라
  • 울다 웃고 또 다짐하리
  • 꿈이여, 지금 깨어나라
  • 넓은 들을 힘차게 달리리
  • 고개를 넘어가자
  • 노력과 성사
  • 아, 이제야 공부한다

문효진은 하늘 대한 효의 심정을 담아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고, 확고한 결의와 목숨을 건 도전을 표현하였다. 이 때 부친인 문선명 총재에게 바친 시들을 한데 모아 문효진은 ‘승리하는 사람’을 출간하였다.

문효진은 부친의 댄버리 수난 노정 기간 동안 형제자매와도 같은 축복가정 2세들과 함께 특별한 40일 수련정성을 들였다. 1985년 7월 6일부터 8월 16일까지 진행된 수련에서 문효진은 하나님과 참부모이신 문선명·한학자 총재께 효정의 결의를 바쳤다. 문선명·한학자 총재는 문효진의 정성어린 행보에 장자로서 참된 ‘효자’의 길을 걸었다며 격려하였다.

한편 문효진은 2005년 12월 28일 장남 문신길의 교통사고 사망(성화) 이후 신앙인으로서 특별정성을 시작했다. 자녀인 문신길이 죽음 이후 영계(사후세계)에서 건승하길 기원하며 미국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매주일 아침 7시에 2년 3개월간 설교단상에 섰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경전을 경건하게 훈독하고 깊은 기도와 명상 가운데 식구들 앞에 말씀을 전했다. 인류의 부모이신 하나님과 참부모의 길에서 승리한 문선명·한학자 총재를 향한 심정의 고백이었으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인류가 가야 할 효정의 길을 성찰하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문효진은 음악가 겸 미디어 사업가, 청년 평화운동가, 효정의 신앙인으로 불꽃처럼 짧은 45년 3개월의 생애를 살았다. 2008년 3월 17일 서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한남동 공관에서 심근경색으로 별세하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효정의 빛을 밝힌 시대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문효진의 별세 이후 문선명 총제는 ‘심천개방원 충효개문주’(深天開放苑 忠孝開門主)라는 휘호를 내리고 ‘효정의 생애’를 치하하였다.

 

“How do we go about changing reality? Oh, boy. Where should we start? Look at you. Look at yourself. What can you do? If that is the basic simple question that we have to answer, where do you stand? What kind of community can you make? Ultimately achieving that goal, that’s the task at hand. Somebody has got to do it.”

 

– by Hyo Jin Moon on Sundays at Belvedere

PHOTO GALLERY

Shining rays of hope
around the world with
a filial heart for heaven

I Remember Hyo Jin Moon

 

“I remember Hyo Jin Moon at the World CARP Convention in London in 1989. At that time I was serving as the British CARP President, and one day toward the end of a very busy week with Hyo Jin Moon, we were watching the Hanmadang Sports Games. Suddenly, news came that one brother from Japan had collapsed during the 5K race and been taken to the hospital. Although there did not seem to be immediate cause for alarm, when I reported the incident to Hyo Jin Moon a few minutes later, and he suddenly became very attentive and prayerful. Within a few seconds, he decided, ‘Let’s go right now to the hospital and pray for him.’

When we got to the hospital we learned from the very worried doctors that the situation was much more serious than we thought and there was a real risk that the brother might not make it. Right there in the hospital Hyo Jin Moon led us in a beautiful, passionate prayer that his life would be spared, and indeed he recovered consciousness the next day and after several weeks of convalescence was eventually able to return to Japan and make a full recovery.

I’m quite convinced that without Hyo Jin Moon’s decisive leadership and prayer on that day, the outcome could have been tragically different.”

-Dr. Michael Balcomb, FFWPU Europe President

 

“I remember the calm stillness of a windless day, fishing with True Parents on the Hudson river for stripped bass. I was always uneasy getting too near to True Father’s boat and interrupting the concentration and intensity of his fishing. This afternoon, the stillness was broken as a Good Go boat came flying up the river, its wake spanning out across the calm water as it pulled a u-turn and came to rest alongside True Father’s boat. Hyo Jin called out to his dad; I don’t remember if he climbed on board, but I do remember thinking nobody else but a true son could express that freedom, the simple expression of love from a son to his father. Thank you Hyo Jin for showing that true courage, love and integrity can shine through the battles of life. We still miss you.”

-Kit Ogden, United Kingdom

 

“I was so fortunate to be in Korea for the Coronation of God’s Kingship. I will never forget when True Parents came out and walked down the center aisle toward the stage. In the procession we saw Hyo Jin Moon. How wonderful, how much joy filled my heart to see him there. He is truly a warrior showing us incredible will and perseverance.”

-Dominick Ladolcetta, Alabama

 

“After long, hard training for a 5000-meter race in preparation for the Hang Ma Dan Games in France for the 1990 France CARP Convension, I took my first flight ever out of the country. I sat in a crowd in the Paris Convention Center, where Hyo Jin Moon got on the stage and started strumming that guitar like I’ve never seen before. All the strain and fatigue I felt just receded. His powerful spirit uplifted me and I was ready to receive our brothers and sisters from East Germany and partake in the 5000-meter run the next day. His beautiful lyrics, melodies and talks were a way to welcome in his warm embrace our brothers and sister from behind the Iron Curtain. It feels just like yesterday. Hyo Jin Moon is very much alive in my mind.”

-Ernest Thabo Leballo, South Africa

 

“In Berlin, suddenly Hyo Jin Moon came into a lecture room with a humble attitude one cannot forget. He said a few words, but they were to the point. His passion still lives in the over 100 albums he composed dedicated to True Parents. Hyo Jin Moon was a rough diamond, but a diamond nevertheless, for which one digs deep. His short but meaningful speeches toward the end of his short life puts it all in a nutshell. Dear beloved older brother, Hyo Jin, we love you and miss your jokes and music!”

-Campagne G., France